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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외로움이라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by 兌蓮 2022. 6. 10.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딘가에 속해있지 못하면 불안감을 느끼거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곁에 없을 때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을 마주할 때,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오가지만 어디에도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없을 때, 연락이 오는 친구도, 친척도 없을 때,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 또한 삶을 살아가다보니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성격 덕분에 나를 좋게 봐주는 친구들도 많았고, 연애를 할 수 있는 경험들도 드문드문이기는 하지만 주어지는 환경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 외로움이 사라졌다는 행복감과 안정감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유지되지 않았다.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행복감은 조만간 나의 귀중한 시간을 앗아가는 사람들로 느껴지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와 인연된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고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삶의 본질에 관련이 없는 내가 현재로서는 관심이 없는 이성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 속에서 한숨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친구들의 고민을 열의를 다해서 들어주고는 있지만, 삶에서 고민하는 것들이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피상적이라고만 생각이 든다. 사람을 만날 때 당연히 아름다운 외모는 매력을 느끼게 한다는 것에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랑이란 것에 그것이 다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더 예쁜 옷을 입고 싶어하고, 더 진하게 화장을 하고 상대방의 카톡 답장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이런 삶은 그다지 삶에 만족을 가져오는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다양하고 정답이라는 것은 없어서 자신이 이생에 입고온 육신의 성향대로 살아가게 되고, 자신이 이생에 이뤄야 할 인연법과 업과 덕을 쌓아가면서 저마다 살아가게 된다. 거기에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개념이라는 것은 있지 않다. 다만, 삶의 모습이 피상적인 것에 머무는가, 보여지는 측면보다는 보이지 않는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간혹 자연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보이지 않는 기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깊은 영혼의 내면에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 특히나 젊은 사람 중에서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문명 자체가 너무 물질화되기도 하였고,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주는 편리함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종교는 당장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 것 같이 보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과학이 육신을 편하게 할지는 몰라도, 영혼에 안식을 주거나 성숙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블로그에서 영혼의 존재유무나 기의 존재유무와 같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증명하려고 쓰는 글도 아니고, 토론하거나 싸우려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한국에서는 특히나 물질적인 것 이외의 현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성향이 많이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한의학은 한무당이라는 형태로, 역술가는 점쟁이와 같은 형태로 전통적인 형태의 학문은 모두 뒤떨어진 미신에 불과한 사라져야 할 가짜 학문이라는 믿음이 팽배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과학에 대해서도 전통 학문에 대해서도 깊이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신기하다.

 

어쨌든 그런 지식적인 만족만을 위한 논쟁은 어떤 이득도 없고, 삶에 어떤 변화도 주지 않는 소모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냥 각자 생각하는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글을 잘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꾸준히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답답해지는 사람이다보니, 지금까지 일기던 블로그던 항상 써왔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내 삶에 큰 변화가 있을 예정이기도 하고, 더 이상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내 마음 속 생각들을 가감없이 익명 뒤에 숨어서 쓸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다.

 

외로움이 축복이라고 표현한 데도 바로 이런 이유가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힘을 얻는 부류 중 하나다.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것 나름대로의 행복감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항상 잃는 것이 있는 것인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 그 만큼 신경쓰고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 삶의 시간들은 내가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사용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본질과 동떨어진 것들일 때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배려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달리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나"로써 온전히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내 생각과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일 수도 있고, 아픔일 수도 있으며, 과한 것일 수도 있고 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절제할 수 밖에 없고, 순수함 그 자체로 이 현실을 살아가기는 녹록치 않을 때가 많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든, 사회속에서 살아가든 배려를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지만, 그러한 행위가 자연에서와는 달리 조금은 인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고 시행착오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자연속에서 살아낸 사람들은 어쩌면 사회 속에서도 더 잘지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즐거움도 있지만, 나는 최대한 자신의 개인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내 개인 공간에서는 오롯이 나인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나로써는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들이 상당히 어려울 수 밖에 없고, 관계에 책임을 잘 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혹 만나게 되더라도 나의 이러한 성향을 적극 수용할 수 있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와 오랜 기간의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너무 가까워지면 나는 지금껏 조금씩 그 관계를 정리해왔다. 그것은 그에게도 상처가 되고, 나 또한 힘듦이 된다. 그래서 나는 정말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내 마음을 주지 않을 생각이다.

 

외로움이라는 대가를 감당해야 하지만, 그 뒤에 오는 보상 또한 만만치 않은 축복이니 말이다. 나는 되도록 사람을 만나지 않고 꾸밈없는 자연을 내 친구삼고, 애인삼고 싶다. 그것이 나를 확장시키고 최종적으로 내가 느껴야 할 삶의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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