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존경받는 삶, 부모님께 효도하는 삶,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 다재다능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할 수 있다. 그건 그 사람이 못나서일까? 그건 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속시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이 삶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쓰라린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하면서, 혹은 가족 사이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나는 셀 수 없는 자책을 했다. 남들이 나를 아프게 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루로 만들었었다.
그런데 이 자책의 정도가 심해지면, 나는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다.
내가 과거 그랬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건 표면적으로 보면 겸손함이거나 책임지려는 마음이었지만, 더 깊이 바라보면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밖에 있다고 착각하는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자책하고, 외부에서 나는 충분히 유용한 존재임을 입증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너희에게 충분히 쓸모있는 존재임을 입증해줘" 하며 징징거리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징징거리는 사람을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경우가 많으며, 오히려 이 사람은 삶의 낙오자로 낙인찍히게 되기 마련이다.
인생에서 나를 도울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나 뿐임을 깨달았을 때, 내가 집착하던 외부의 모든 현상들과 사람들에 대한 집착심을 내려놓고 내 삶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정이며 진짜 자존심은 그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외부의 평가로서 살아가는 나라는 것은 낙오자이다. 돈이 많지 않고, 자신의 집과 차와 연인이 없고, 학력이 보잘 것 없다면 필연적으로 비교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 상대적인 세계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낙오자에 불과하다.
근데 사실을 알고보면, 그렇게 외부에서 평물질적인 면의 성공이라는 측면만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의 평가는 내 삶의 성공과 행복에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질적인 측면에 빠진 사람들은 이 글을 보면 자기합리화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루저의 정신승리라는 것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나라고 해서 물질적인 가난을 추구하거나 무소유를 주장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건강하게 돈도 많이 벌고, 외부의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며,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이며, 자신을 이롭게 하는 방법이지,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자신있게 내가 살아온 삶을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자신한다. 모두가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대로 충실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제 각기 완전하지는 않지만, 밝든, 탁하든 나름의 빛을 발하면서 자신의 세상을 밝히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 시선과 평가에 대한 걱정을 모두 떨쳐버리고 시원스럽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비로소 자신감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인 내면을 충실히 해나가는 노력이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스스로 옳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살았다 할 수 있고, 그 날 하루의 덕을 쌓으며 성장한 것이다.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옳음은 항상 내 마음에 있고, 세상을 비춰보며 경전을 볼 수 있으며, 사람을 바라보며 부처님을 발견하게 된다. 결코 깨달음을 문자에서 찾고자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지 않는 후진국 한국 (0) | 2022.06.18 |
---|---|
익숙함을 벗어나기 (0) | 2022.06.17 |
삶이라는 연극의 각본가 (0) | 2022.06.13 |
이름없는 산과의 대화 (0) | 2022.06.11 |
외로움이라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0) | 2022.06.10 |
댓글